로쿠고 마사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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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쿠고 마사치카는 1764년에 태어나 1812년에 사망한 인물로, 1785년 로쿠고 마사하야시의 은거로 인해 가독을 상속받아 혼조 번의 번주가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화재, 지진, 농민 반란 등 여러 재해와 사건들을 겪었으며, 간척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승려 각림의 죽음과 같은 사건도 있었다. 그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남 마사요시가 폐적되어 셋째 아들 마사즈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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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고 마사치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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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로쿠고 씨 |
이름 | 로쿠고 마사치카 |
씨명 | 로쿠고 씨 |
이름 | 로쿠고 마사하야 |
개명 | 쇼사부로(어릴 적 이름) 마사하야 |
이명 | 마사타케 마사마사 마사치카 |
시호 | 없음 |
계명 | 간코인진다쓰라치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 니시아사쿠사의 만류지 |
관위 | 종5위하, 사도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이에나리 |
번 | 데와혼조 번 번주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후기 |
생년월일 | 메이와 원년(1764년) |
사망일 | 분카 9년 10월 26일(1812년11월 29일) |
부모 | 아버지: 로쿠고 마사야스, 어머니: 불명 |
형제자매 | 마사토요 마사하야 마사아키라 사에구사 모리요시 정실 이쓰라 |
배우자 | 나가이 나오토모의 딸 |
자녀 | 마사요시 마사즈미 등 |
특기 사항 | 명주 만자와 소동 기사카타 산노마루 슈신칸 |
관직 계승 정보 | |
전임자 | 로쿠고 마사시게 |
후임자 | 로쿠고 마사즈미 |
직책 | 혼조 번 번주 |
대수 | 7 |
임기 | 1783년 ~ 1812년 |
2. 생애
메이와 원년(1764년) 혼조번의 제6대 번주 로쿠고 마사하야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들의 요절로 덴메이 원년(1782년)에 적자가 되었고, 덴메이 5년(1785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하여 제7대 번주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혼조번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성 아랫마을의 화재, 조카이 산 분화, 분카 원년(1804년)의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했으며, 명주 생산과 관련된 부정으로 인해 대규모 농민 반란인 '만자와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분카 대지진은 영지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고, 번은 복구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부채가 늘어났다. 이러한 재난 대응 과정에서의 실책과 부정은 번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덴메이 시대에 번사 교육을 위해 성 안에 번교인 슈신칸을 창설하는 등 교육 진흥에 힘썼다. 또한 분카 대지진 이후 지형이 변한 기사카타 지역의 간척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 및 사찰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분카 9년(1812년) 10월 26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남 마사요시가 폐적되었기 때문에 셋째 아들 마사즈미가 뒤를 이었다.
2. 1. 가독 상속
메이와 원년(1764년), 제6대 번주 로쿠고 마사하야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초 아버지 마사하야시는 제5대 번주 로쿠고 마사나가의 장남인 마사노부를 양자로 삼았으나, 안에이 5년(1776년) 3월 18일에 마사노부가 요절하였다. 이후 마사치카의 형인 마사카타가 적자가 되었지만 그 역시 요절하면서, 덴메이 원년 12월 11일(1782년) 마사치카가 적자로 정해졌다. 덴메이 2년(1782년) 7월 1일,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하였고, 덴메이 3년(1783년) 12월 18일에는 종5위하 사도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덴메이 5년(1785년) 3월 10일, 아버지 마사하야시가 은거함에 따라 가독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4월 19일에는 오쿠니이리(영지로 돌아가는 것) 허가를 받았다.마사치카의 치세 동안 혼조 번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성 아랫마을의 화재, 조카이 산의 분화, 대지진 등 자연재해가 잇따랐으며, 명주 생산과 관련된 부정으로 인해 대규모 농민 반란인 '만자와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분카 원년 6월 4일 밤(1804년 7월 10일) 영내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막대한 피해를 남겼고, 번은 복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러한 천재지변의 사후 처리 과정에서 부정과 실책이 발생하여 혼란이 가중되었고, 시가지에서는 도매상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등 번의 운영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지진 발생 후인 분카 3년(1806년)에는 영내 상인 52명에게 총 1700냥이 넘는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개척 비용에 충당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덴메이 시대에는 번사 교육을 위해 성내 삼의 원에 번교인 슈신칸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분카 9년(1812년) 10월 26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남 마사요시는 분카 7년(1810년)에 폐적되었기 때문에, 셋째 아들 마사즈미가 그 뒤를 이었다.
2. 2. 번정 개혁과 한계
로쿠고 마사치카의 치세는 순탄치 않았다. 성 아래 마을의 화재, 조카이 산의 분화, 대규모 지진 등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했으며, 명주 생산과 관련된 부정 문제로 인해 대규모 농민 반란인 "만자와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특히 분카 원년(1804년) 6월 4일 밤에 발생한 대지진은 영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번은 피해 복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러한 천재지변의 사후 처리 과정에서 부정과 실책이 발생하여 혼란이 가중되었고, 시가지에서는 도매상들 간의 분쟁까지 일어나는 등 번정 운영에 어려움이 극심했다. 지진 발생 후인 분카 3년(1806년)에는 영내 상인 52명에게 총 1700냥이 넘는 빚을 지기도 했는데, 이는 후술할 개척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덴메이 시대에 번사 교육을 위해 성 안 삼의 원(三の丸)에 번교인 슈신칸(修身館)을 창설하는 등 교육 진흥을 위한 노력도 있었다.
분카 원년의 대지진(기사카타 지진)은 마쓰오 바쇼가 『오쿠의 호소미치』에서 묘사했던 구십구 섬(九十九島)과 팔십팔 석(八十八潟)의 경승지 기사카타의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지진으로 땅이 융기하면서 과거 바다 위에 떠 있던 섬들은 넓은 육지 위에 작은 언덕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이전까지 기사카타는 경승지로 여겨져 섬을 관리하는 역할(島守)을 두었을 뿐이었으나, 혼조번은 지형 변화를 미개척지가 생긴 기회로 삼아 간척을 통한 농지 개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번은 자금을 마련하여 지진 발생 수년 후부터 간척 사업에 착수했다.
초기 계획은 작은 언덕(과거의 섬)들을 모두 없애고 그 흙과 베어낸 소나무를 이용해 넓은 농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의 유명 사찰인 간만사(蚶満寺)의 주지 각림(覚林)이 경승지 파괴에 반대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번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자, 각림은 교토로 가서 칸인노미야(閑院宮)를 설득해 간만사를 황실의 기도소로 지정받고, 조정의 권위를 등에 업고 반대 운동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번은 각림을 함부로 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신규 농지 개발을 강행하려 했던 번은 에도에 머물던 각림을 체포하여 승려가 아닌 속명 '간스케'(勘助)라는 이름으로 감옥에 가두었고, 결국 각림은 옥중에서 사망했다.
각림의 사망 이후 번의 개척 사업은 계속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주요 언덕들은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는 각림의 원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단순히 비용이나 노동력 문제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논밭 사이에 섬처럼 작은 언덕들이 점재하는 독특한 풍경의 명승지 기사카타가 형성되었다.
2. 3. 기사카타 간척 사업과 각림의 죽음
마쓰오 바쇼가 『오쿠의 호소미치』에서 언급했던 명승지 기사카타는 본래 얕은 바다에 작은 섬들이 떠 있는 구십구 섬(九十九島)·팔십팔 석(八十八潟)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1804년 발생한 기사카타 지진(象潟地震)으로 인해 땅이 융기하면서 넓은 육지에 작은 언덕들이 점재하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이전까지 기사카타는 경승지로 소중히 여겨져 섬을 지키는 역할(島守)까지 두었으나, 혼조번은 지진으로 인해 광대한 미개척 평원이 생겨난 것을 오히려 기회로 여겼다. 번은 자금을 마련하여 지진 발생 몇 년 후부터 간척을 통한 농지화 사업에 착수했다.초기 계획은 작은 언덕(과거의 섬)들을 모두 허물고, 그 흙과 베어낸 소나무를 이용해 광대한 농지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의 유명 사찰인 간만사(蚶満寺)의 주지 각림(覚林)이 경승지 파괴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번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자, 각림은 교토로 가서 칸인노미야(閑院宮)를 설득해 간만사를 기도소(祈願所)로 지정받았다. 이를 통해 조정의 권위를 등에 업고 반대 운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했다. 이 때문에 번은 간만사나 각림에게 함부로 손을 대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새로운 농지 개발을 강행하고자 했던 번은, 에도에 머물던 각림을 체포하여 승려가 아닌 속명 간스케(勘助)라는 이름으로 감옥에 가두었고, 결국 각림은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번의 간척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나, 작은 언덕들 중 주요한 것들은 파괴되지 않고 남겨졌다. 이는 각림의 원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단순히 비용이나 노동력 문제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전원 풍경 속에 섬처럼 작은 언덕들이 점재하는" 명승지 기사카타의 모습이 남게 되었다.
2. 4. 사망
분카 9년(1812년) 10월 26일에 향년 49세로 사망했다. 장남 마사요시는 분카 7년(1810년)에 이미 폐적되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마사즈미가 그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됐다.3. 가계
- '''부모'''
- * 아버지: 육향정림
- '''정실'''
- * 수(秀): 셋쓰국 다카츠키번 번주 나가이 나오치카의 딸. 원래 혼다 마사토모의 정실이었다.
- '''자녀'''
- * 장남: 육향정방
- * 삼남: 육향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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